'신장 돌려달라' 이혼 소송 기사를 읽고
◆강현우 '피흘리지 말고 떼어가라' 롱아일랜드에 사는 한 외과 의사가 이혼 소송을 진행 중인 부인에게 8년전 이식해 준 신장을 되돌려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는 기사를 읽었다. 이유는 아내가 5년전 만난 물리치료사와 사랑에 빠지면서 자신을 상대로 이혼 소송을 제기했기 때문이란다. 이 기사를 접하면서 ‘사랑과 이혼이라는 것이 과연 생명과 선을 나란히 할 수 있는가’ 한 번 생각을 해봤다. 생명은 사랑보다 윗선이어서 뺏고 뺏기는 그런 부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신장 질환을 앓고 있는 아내에게 자기의 신장을 준 것은 사랑보다 훨씬 고귀한 생명을 준 것이다. 내 배를 가르고 내 신장을 주는 일이 쉽겠는가만 그런 결정을 하기까지는 사랑보다 윗선인 생명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그 신장을 준 사람이 아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신장을 돌려달라고 소송을 냈을까. 이 의사는 “나는 그녀의 생명을 구해줬는데 이제는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의 배신감을 느끼게 됐다”며 인터뷰에서 답답한 심정을 밝혔다. 나는 그가 측은했다. 물론 의사도 사람이다. 사랑에 목숨을 걸고 배신감에 괴로워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 의사는 조금 다른 것 같다. 자기가 준 신장으로 살고 있으니 나를 남편이 아닌 신으로 떠받들어줄 것을 요구했거나 그것도 아니면 그녀를 노예처럼 부리지는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말해 남편과 아내의 동등한 자리를 신장 이식 수술 후부터는 주종관계로 만들지 않았는지 궁금하다. 또 끊임없이 “내가 네 생명을 살렸으니 내게 잘 해야 된다. 알았지?”하는 공치사로 그녀를 질리게 만든 것은 아닌지, “내가 너를 살렸으니 남편의 역할을 조금은 하지 않아도 네가 이해해라”라며 결혼생활을 소홀히 한 것은 아닌지, 그야말로 여러가지 추측이 난무한다. 왜냐하면 사람으로서는 절대로 거래를 할 수 없는 생명의 일부인 장기를 내놓으라며 유치하고 허술한 인격 싸움을 걸어 왔기 때문이다. 생명을 준 그 고귀한 행위에 그는 스스로 먹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생명이 어디 필요할 때 주고 불필요하면 버리는 장난감인가? 그녀를 두둔할 마음은 절대 없다. 더구나 그녀의 바람을 옹호할 생각은 더더욱 없다. 그들에겐 8살, 11살, 14살짜리 세 자녀가 있다고 한다. 그런데도 그 어미의 생명을 담보로 흥정을 하고 있는 것이 도저히 납득이 안간다. 더군다나 생명 수호의 일인자라는 의사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 말이다. 요즘 세상에는 모든 것을 돈으로 살 수 있다고 한다. 때로는 인간의 장기들도 매매가 되고 있다. 어린애도 살 수 있고, 인공위성도 살 수 있지만 그래도 여전히 살 수 없는 것이 딱 한 가지가 있다. 그것은 사랑이다. 아무리 물질만능주의 사회에서 산다고 해도 진정한 사랑만큼은 돈을 억수로 준다고 해도 살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생명의 은인이라는 이유로 사랑을 강요한건 아닌지. 결론적으로, 그가 그녀의 신장을 가져가겠다면 ‘베니스의 상인’에서 판사가 샤일록에게 내린, 심장에서 가장 가까운 살 두 근을 가져가되 피 한 방울 흘려서는 안된다는 판결처럼 그 의사도 신장을 되돌려가되 피 한방울 흘리지 말라고 판결하면 너무 독한 것인가. ◆채수호 '인연으로 돌리고 체념하라' 8년전 아내에게 떼어 준 신장을 다시 돌려달라며 소송을 제기한 롱아일랜드 어느 의사의 이야기를 신문에서 읽고 세상에 참 별 일도 다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사이가 멀어진 부부가 갈라서면서 전에 해 준 패물이나 결혼지참금을 돌려달라는 경우는 보았어도 뱃속에 있는 장기를 되돌려달라는 일은 생전 보도 듣도 못했기 때문이다. 또 미국 최고의 직업이라는 의사의 부인이 무엇이 아쉬워서 물리치료사와 눈이 맞아 바람을 피웠을까. 신장병 환자에게 타인의 신장을 부작용 없이 이식할 수 있는 확률은 1000분의 1정도라 한다. 남편으로부터 신장을 이식받고 건강하게 살고있는 바티스타씨의 부인 다우넬은 남편이 아니었으면 어쩌면 생명을 잃었을지도 모른다. 배우자 일 뿐 아니라 생명의 은인인 남편을 배반하고 다른 남자와 가까와져 이혼수속을 하고있는 부인에 대한 분노와 배신감이 어느정도인지는 같은 남성으로서 충분히 이해가 간다. 더우기 숭고한 남편의 희생과 사랑을 배신으로 되갚은 다우넬 부인은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지탄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부정한 부인의 식어버린 사랑을 되돌릴 수 없듯이 한번 떼어준 신장을 되돌려달라고 요구하는 것도 무리가 아닐 수 없다. 부모자식간에도 마음대로 안되는 것이 세상사이며 인간관계다. 이번 사건에 대한 기사를 읽으며 우리나라 정승과 그 부인에 관한 설화 한토막이 생각났다. 옛날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푸는 지혜롭고 덕망있는 정승이 살았는데 그에게는 현모양처로서의 부덕을 모두 갖춘 어질고 착한 부인이 있었다. 어느날 갑자기 부인이 아무 말도 없이 집을 나가버리자 정승은 그렇게 정숙하던 부인이 아무런 까닭도 없이 가출해버린 이유를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슬픔에 빠진 정승은 국사도 팽개친 채 부인을 찾아 나섰다. 집나간 부인을 찾아 전국 방방곡곡을 헤매고 돌아다닌 지 3년만에 정승은 어느 산골에서 부인을 발견한다. 부인은 화전을 일구고 숯을 구워 생계을 이어가는 우락 부락한 화전민의 아낙이 되어 초라한 행색으로 밭에서 일하고 있었다. 기가 막힌 정승은 부인의 손을 잡고 함께 집으로 돌아가자고 애원했으나 부인은 고개를 가로 저으며 정승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전생에 저 사람은 산돼지였고 나는 그 산돼지에 붙어 피를 먹고 사는 이였습니다. 이승에 부부연으로 만나게되는 인연을 저로서도 어찌할 수 없으니 정승께서는 그대로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바티스타씨도 차라리 모든 것을 인연으로 돌리고 체념하는 것이 어떨까. 그가 부인에게 자신의 신장을 기꺼이 떼어 준 것은 진정으로 부인을 사랑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랑에는 어떠한 댓가가 있을 수 없다. 만약 대가를 기대하고 사랑을 베풀었다면 그것은 이미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다. 객관적인 신장의 가치를 150만달러라고 한다지만 바티스타씨의 부인에 대한 사랑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숭고한 것이다. 부인 다우넬은 그의 신장에 의존해서 목숨을 유지하고 있는 동안 평생토록 양심의 가책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것이 배신에 대한 가장 무서운 형벌일지도 모른다.